박성광 원장과 이수진 전임의의 즐거운 만남 [24년 봄호]
편집부
news@ksnnews.or.kr | 2024-03-02 14:58:42
박성광 원장 / 전주 함께하는내과 원장, 한국장기기증원 생명나눔 의료진 전문 강사,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이수진 전임의 / 전북대학교병원 신장내과 전임의사
박성광 원장은 내과 전공의로 시작해, 전북대학교병원 신장내과 교수, 전북대학교병원 이식센터장, 전북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장, 대한신장학회 회장 등을 거쳐 현재는 전북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함께하는 내과 원장으로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제자인 이수진 선생을 통해 박성광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Q1. 이수진 선생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수진입니다. 대학교에 계실 때와 은퇴하신 현재를 비교하면 어떤 점이 가장 달라지셨나요?
A1. 박성광 원장
제일 큰 변화는 핸드폰을 끄고 잘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있을 때는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주인에게 핸드폰을 맡겼어요. 그리고 저희 병원은 혈액투석 환자만 보고 외래가 없으니까, 시간상으로 좀 더 여유가 있어요.
Q2. 이수진 선생
교수님께서는 전북대학교 의과대학의 명예교수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과대학 교수로서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A2. 박성광 원장
대학교수 시절 학생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의대 3학년 졸업여행을 인솔하여 15년간 3박 4일 지리산 종주를 했죠. 그리고 전북의대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20년간 연주했어요. 올해도 3월 초에 연주회가 있는데, 드보르작 8번 교향곡이 어려워서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정년 후에도 일주일에 한나절씩 학생들이 임상실습을 나오니까 학교에 계속 있는 것 같아요. 작년 5개의 대학병원에서 뇌사자 장기기증 강의를 했고, 올해는 국제 학회에서 기증 강의가 계획되어 있어요.
Q3. 이수진 선생
학생들과 교류도 많으셔서 학생들이 잘 따랐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으실까요?
A3. 박성광 원장
스승 같은 제자가 한 명 떠오르는데, 황하수 선생님입니다. 통일부에서 기획관리실장과 남북회담 본부장까지 지내고 퇴직해서 전북의대에 입학할 때 나이가 57세였어요. 현재는 말라위 대양누가병원에 부원장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황하수 선생님이 인턴일 때, 체력이 달리고 너무 힘들어서 사표를 낸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사표도 수리했는데 내가 설득했고, 다시 들어와서 인턴을 잘 마쳤어요.
학생들이나 전공의들에게 “환갑이 넘은 황하수 선생님도 인턴, 레지던트를 잘 마쳤다. 너희들도 해낼 수 있다.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곤 해요. 올해 초 필요한 약품과 수술기구를 선생님께 드리려고 말라위에 다녀왔어요.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고 열악한 환경에서 정성껏 환자를 돌보는 황 선생님만큼 인생의 후반전을 멋지게 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Q4. 이수진 선생
교수로 재직하시는 중에 가장 기뻤던 때는 언제였나요?
A4. 박성광 원장
미국 Stanford 의대로 연수를 갈 때 Juvenile Diabetic Foundation에 Fellowship을 신청해서 연봉 32,000불을 받았을 때, 1997년에 전북대에서 동물 실험한 일로 ‘Kidney International’에 두 차례 논문이 실렸을 때, 2004년에 국가지정연구실로 지정되어 5년간 10억의 연구비를 받았을 때가 기뻤어요. 그리고 기증을 거부하거나 회의적인 뇌사 추정 환자의 가족들을 설득해서 동의받았을 때가 항상 가슴이 뿌듯합니다.
Q5 . 이수진 선생
SCI 논문을 많이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논문이 있으신가요?
A5. 박성광 원장
1987년에 전북에 Leptospirosis 가 창궐했어요. 그래서 혈청형으로 확진된 93명의 환자의 임상 양상을 심장, 폐, 간, 신장, 근육의 necropsy 소견과 함께 ‘Am J Trop Med Hyg’에 실었는데 Harrison 책의 Leptospirosis 편에 참고문헌으로 실렸죠. 또 한 번은 1990년에 초어(grass carp)의 쓸개를 먹고 급성신부전에 빠진 환자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대학교병원과 예수병원의 환자들을 함께 모아서 ‘Nephron’에 보냈는데 “이런 훌륭한 원고를 보내줘서 고맙다”면서 아무 교정 없이 실어준 것은 이것이 유일했어요.
Q6. 이수진 선생
교수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요?
A6. 박성광 원장
“네 꿈이 끝날 때, 네 청춘도 끝난다.”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꿈을 잃지 않으면 청춘이고, 아무리 젊더라도 꿈이 없으면 노인과 다름이 없어요. 또 “Stop learning, Start dying”이란 말도 있지요. 계속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좋아합니다.
Q7. 이수진 선생
항상 꿈꾸시는 교수님의 비전이 있으실까요?
A7. 박성광 원장
어릴 때 꿈은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었어요. 잘 웃고 남을 웃기기를 좋아했죠. 근데 우리 가족들은 내 말을 듣고 잘 웃지 않아요. 딸이 하는 말이 “엄마는 입만 열면 잔소리, 아빠는 헛소리”라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뇌사자 장기를 받은 환자가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환하게 웃을 때 꿈이 이루어지는 보람을 느껴요.
Q8. 이수진 선생
작년 <심장이 멎기 전, 안녕 내 사랑>이란 책을 내셨는데, 어떤 책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A8. 박성광 원장
학생들에게 “사망진단서에 사망 시각을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뇌사 판정을 받은 시각을 쓰겠나? 아니면 수술실에서 심장이 멈춘 시각을 쓰겠나?”하고 물으면 대부분 “심장이 멈춘 시각을 쓴다”고 대답해요. 그러나 우리나라 법에는 심장이 뛰고 있어도 뇌사 판정을 받은 시각을 사망 시각으로 쓰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장기 기증하는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이 멎기 전에 가슴이 찢어지는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책을 쓰고, 제목을 『심장이 멎기 전, 안녕 내 사랑』이라고 정했어요.
Q9. 이수진 선생
뇌사자 가족분들의 기증 결정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A9. 박성광 원장
가족들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지요. 뇌사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합니다. 사망하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만 기증하면 누군가를 살리고, 그 몸속에서 살아있다고 말하지요. 이제껏 기증하고 후회하는 가족분을 본 적이 없어요. 기증하신 가족분들이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지금도 전화가 오는데, 그러면 성심성의껏 도와드립니다.
Q10. 이수진 선생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분이 있으신가요?
A10. 박성광 원장
폭행과 연루된 분이 뇌사 판정을 받고 적출 승인을 요청하였어요. 향후 부검이 필요하여 적출이 불가하다는 통지를 받았고, 새벽 1시에 전주지검에 달려가서 검사님을 만났어요. 간과 신장을 기증하기에 장기 적출 수술을 시행한 후에 부검을 진행해 주시면 좋겠다고 간청하였어요. 다행히 2개의 신장, 2개의 각막과 조직까지 기증한 후에 부검이 실시되었고,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한미수필문학상에 응모하여 우수상 상금 오백만 원을 받아 전북대병원에 기부했어요.
또 29세 김광명 님은 교통사고로 장기기증을 했는데, 기증자 어머님이 부의금 236만 원을 아들이 좋은 곳으로 가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식센터에 기부하셨어요.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다른 곳에 쓰시라고 돌려드렸는데, 가다가 주차장 관리실에다가 기부해달라고 맡기고 가셨어요.
Q11. 이수진 선생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A11. 박성광 원장
지난달에 주례를 했는데 “요즘 가장 큰 애국과 효도는 애를 많이 낳는 것입니다. 저희 딸도 일을 하면서 애를 세 명을 낳아서 잘 키우고 있습니다.” 하니까 큰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주례를 많이 했는데 박수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우리 이수진 선생도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순산을 빕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또 낳으세요. 혼자는 너무 외로워요. 영어에도 “Sister is the best friend given by God”이란 말이 있어요.
그리고 후배들이 뇌사자 장기기증에 관심을 뒀으면 좋겠어요. 43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아니었으면 사망했을 환자를 살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환자는 몇 명 되지 않아요. 내가 아니어도 더 훌륭한 다른 의사가 살렸을 거예요. 그러나 기증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가족들을 설득하고, 그렇게 기증받은 장기로 생명을 얻게 된 수백 명의 얼굴도 모르는 말기중환자들은 내가 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나중에 내가 죽어서 하나님께서 “너는 세상에서 지은 죄가 이렇게도 많은데 혹시 무슨 선한 일을 한 적이 있으면 말해 봐라”라고 물으실 때 “뇌사자 가족들에게 가끔 욕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장기를 기증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하여 말기 환자들이 새 생명을 얻게 하고자 노력했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려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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