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및 기행문] 상실로부터 도망치는 법 [22년 봄호]

편집부

news@ksnnews.or.kr | 2022-03-02 12:54:22

이지현 / 미술치료스튜디오 심 대표, 이대서울병원 미술스튜디오(EUMC ART THERAPY STUDIO) 미술심리치료 디렉터

몸이나 마음이 불편할 땐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내가 집중해야 할 대상 안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을 그 불편감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감에 시달릴 때 나는 TV를 켜고 화면 속 커서가 움직이는대로 의식 없이 영상을 선택해서 보기 시작한다. 영상 속 이미지의 움직임이나 스토리에 축 늘어진 나를 던져넣고 나면 조금씩 집중이라는 단단한 에너지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아무리 들어 올리려해도 허물어져 버리는, 축 늘어진 액체괴물같은 나를 영화 「파이브 피트」 속으로 던져 넣었다.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두 주인공이 신생아실에 함께 있는 것을 본 간호사 바브의 외침이 나의 생각 어느 곳에 걸려들었다.

‘떨어져! 당장! 우리가 지켜야 하는 규칙을 알고 있지? 6피트! 6피트야 서로 닿아선 안돼!’

‘6피트?......20191031. 3,100,000cm, 100cm, 30cm, 38,000,000cm....’

서서히 단단해진 내 몸이 영화 속에서 나와 소파에 앉아있음을 느낀다. 무엇가를 떠올리고 계산하면서 서서히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조차 없어 그 순간부터 기계가 되어버린 듯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변해 버린 그 날. 그리고 그 후 나의 지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움직인 거리...

나는 그 날의 사건과 절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은 나의 가장 편한 안식처였던 집, 그 중에서도 아이들과 가장 많은 사랑과 교류가 거실에서 일어났다. 가장 소중했던 생의 빛이 꺼져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는 나의 삶 전체를 통해 만들어 온 나의 세계를 상실했다. 모든 판단은 보류되었다. 다양한 색으로 넘쳐나던 세상은 흑백으로 멈춰버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나의 아픔이 큰 것인지, 타인의 아픔이 큰 것인지 재어가며 무엇을 위로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있는 곳을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무너지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잠시 놓았던 공부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학교에 등록했고, 집 한구석에 작은 책상과 의자가 겨우 들어가는 나만의 작은 공간을 마련했으며, 나의 눈과 30cm 남짓 거리의 책들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COVID-19는 모든 사람들을 ‘집’으로 피난시켰고,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에 다시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학교까지의 거리 3,100,000cm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스스로 이 공간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는 나에게 잠시의 틈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원래 내 삶의 루틴에 더 많은 것들을 추가했다.

세 아이를 차례로 깨우고, 먹이고, 학교로 보낸 후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논문과 책의 내용으로 머리를 한가득 채운다. 중간중간 줌(ZOOM)으로 화상회의와 수업이 이어진다. 논문과 연구, 임상. 잇따른 사업들을 계획하고 여러 개의 페이퍼를 번갈아가며 써 내려가는 중에 하나씩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간식을 챙기고 학원 스케줄과 준비물, 연락사항 등을 체크하고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 그 사이 여러 개의 카톡방에 100여개는 거뜬히 넘는 문장들이 쌓여간다. 불시에 울리는 메일은 해야 할 여러 개의 일을 안고 날라온다.

COVID-19로 인해 빼앗긴 학교와의 거리 대신 온라인 작업환경 앞에 끊임없이 머무르며 그 100cm의 공간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세 아이는 COVID-19로 집에 있게 된 엄마의 자리가 너무나 반가웠고 그렇게 세 녀석이 번갈아 가며 나의 자리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의 책상 100cm를 그리고 곧 책을 손에 잡는 30cm의 거리마저 사라져버렸다.

틈을 주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던 두려움은 기가 막히게도 아주 세밀한 틈새도 놓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노트북과 책만 들고서 내가 있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달렸다. 처음엔 아이들을 데리고, 그 다음엔 혼자서...인천, 강화도, 강원도...전라남도까지. 하루의 숨을 쉬고 돌아오면 몇 달을...몇 주를...몇 일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반복할수록 거리는 멀어졌고, 하루의 일탈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줄어갔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이 땅 안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 그리고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쳤다. 집으로부터 38,000,000cm, 통영.

4시간 20분여를 쉬지 않고 달렸다.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한순간도 멈출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 순간의 틈으로 모호한 그것이 나를 따라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10차선이 넘는 넓은 고속도로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좁아지고, 잘 정비된 콘크리트 바닥은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좁고 거칠어졌다.

차의 낯선 덜컹거림, 고속도로 특유의 표면과 타이어가 맞닿으며 내는 윙윙거림이 조급하고 불안한 내 마음을 토닥이기 시작한다. 고요함 속에 반복되는 작은 소음은 온전히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살펴야하는 차선과 차들이 점차 줄어들고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면 조금씩 하늘이, 산이, 그리고 그 끝에 바다가 보인다.

통영이다.

어디든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직선으로 뚝뚝 끊어놓은 서울의 도로와 다르게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은 삶의 흔적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구불구불한 길을 한 참 지나면 통영 바다가 훤히 보이는 숙소가 나온다. 바다와 산이 맞닿은 이곳은 산과 바다의 내음이 오묘하게 섞여 바다 비린내도, 산의 지린내도 사라진 맑은 공기가 흐른다. 대양을 지나온 거친 바람은 병풍처럼 둘러진 섬을 지나며 부드럽고 고요하게 흘러온다.

낮에는 주변의 섬으로 사람을 실어나르는 여객선이, 밤에는 고깃배들이 쉴 새 없이 바닷길을 오가며 철썩거리는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낸다. 하루 종일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산에 사는 다양한 새들의 지저귐이 섞여 혼자 있어도 적막하지 않다.

얼마나 다양한 녀석들이 사는지, 어떤 녀석은 ‘삑’하고 울고 어떤 녀석은 ‘빼르르’하고 우는데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에 우중충한 기분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숙소에는 통영 바다와 하늘이 훤히 보이는 아주 멋진 테라스가 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온몸을 이불로 칭칭 감싸고 테라스의 의자에 기대어 눕는다. 나는 이곳에서 밤이 어둡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어느 곳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밤의 빛을 본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빛 사이로 구름이 바람을 따라 흐르는 것을 밤새도록 바라본다.

그렇게 자연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천천히 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 이불이 차마 덮지 못한 나의 발끝에 부드럽게 쓰다듬는 바람이 지나간다. 발가락을 꼬물거려 본다. 작은 등나무 의자에 편한 듯 힘겹게 의지하고 있는 허리에 딱딱함을 느낀다. 내 귀에 번갈아 지나가는 파도와 새소리를 듣는다. 후하고 숨을 내쉬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나의 숨을 싣는다.

천천히 마음이 보인다. 어떤 틈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멀리 도망쳐온 곳에서 나는 피해왔던 그것을 본다. ‘상실’. ‘맞아. 네가 있었지. 알고 있어. 네가 있다는 것을.’ 맞닿으면 내 삶의 시간을 통째로 먹어버릴 것 같았던 상실감을 마주했지만, 지금 이곳, 나와 나의 세계가 여전히 살아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제서야 나는 편안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우리는 온몸으로 세상을 본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이용해 무엇을 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온몸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온몸으로 세상에 반응하는 것이다. 나의 발이 지금 어디에 놓여있는지, 그리고 나의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나의 관심은 지금 이곳에서 어떤 대상을 향해 떠오르고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대상들은 나를 향해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생각에 반응하며 주변을 향해 나아간다. 먼저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나서 지금 이곳에 함께 한 타자를 바라본다. 이렇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세상 속의 나의 삶을 만들어간다.

상실로부터 도망치는 법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을 살아가는 생명을 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그 안에는 ‘내가 이곳에 있어요.’라고 반짝이는 것들이 숨어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그 생의 움직임을 존중하고 그것들과 함께 작고 소소한 것들을 나누면서 여전히 내가 살아 움직임을, 그 움직임이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아낼 수 있다면, 나의 상실 역시 내 삶을 살아있게 하는 움직임의 하나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 대한신장학회 소식지.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