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우산 [23년 가을호]
편집부
news@ksnnews.or.kr | 2023-09-01 13:16:03
이희룡 / 이신내과의원
지금 저는 개원의사로 살고 있습니다. 혈액투석실, 혈관촬영실, 외래를 함께 보면서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몸과 마음이 나른해집니다. 부드러운 의자 쿠션에 기대다 보면 옛 생각이 절로 납니다.
5년 전 종합병원 신장내과에서 일할 때입니다. 병원 일은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갔습니다. 신장이식 환자, 사구체신염 환자, 감염으로 열이 나는 환자 등등 입원환자부터 지속적 신대체요법을 하면서 하루하루 힘겹게 치료하는 환자, 급성신부전으로 수액치료를 하는 환자, 신장 이식 후 심각한 감염으로 괴로운 환자 등 중환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래환자와 혈액투석, 복막투석 환자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이 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무렵, 신장내과 의사로서 최선을 다한다고는 했지만 하루하루 저는 지쳐갔고 조금씩 소모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피곤하고 힘들면 환자들에게 딱딱하고 불편하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아마 그 시절 저를 본 환자분들은 불친절한 의사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오전 외래를 마무리하고 친한 동료들과 밖에서 식사를 하러 가던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오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외래에 있는 우산 하나를 쥐고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문밖을 나서자 저희 병원 투석치료받는 환자 한 분이 문 앞에 서 계셨습니다. 어딘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저도 그냥 옆을 지나치지 못했고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이고 과장님 안녕하세요. 투석을 마치고 지금 집에 가야 하는데 이렇게 비가 내리네요.”
“그러시군요. 혹시 가족분들 오고 계시나요?”
“다 일하고 있지요. 혼자 가야 합니다.”
평상시 투석실에서도 조용하시고 항상 웃는 낯이던 환자분이 이렇게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계셔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제 방에는 제가 산 우산, 선물 받은 우산 등 이미 여러 개의 우산의 있었기에 별생각없이 환자분에게 우산을 건넸습니다.
“이 우산 쓰고 가세요. 저는 방에 있는 다른 우산 쓰면 됩니다.”
“아이고 과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제가 가지고 있던 우산을 환자분에게 건네고 저는 다시 외래방으로 올라가 다른 우산을 하나 집어 들고나왔습니다. 그새 환자분은 우산을 쓰고 집으로 향하셨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식사를 마치고 환자분과의 일도, 빌려드린 우산도 기억에서 금방 잊혀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투석시간에 환자분은 오지 못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심혈관 문제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졌고 대학병원으로 전원 되었지만 아쉽게도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떤 이별이든 슬프지 않은 이별은 없습니다. 의사로 살다 보면, 특히나 신장내과 의사로 살다 보면 이러한 이별은 자주 만나게 됩니다. 아직도 그런 이별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겨내고 또 다른 환자를 마주하고 제 할 일을 하는 것에는 익숙해졌습니다. 우산을 빌려 간 환자분에 대해 투석실 의료진들이 아쉬워하다가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 가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환자가 외래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를 알아보고 반가워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를 아시나요?”
“네, 과장님. 과장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과장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거든요. 항상 잘해주시고, 챙겨주신다고. 저는 돌아가신 ○○ 환자 아들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장례는 잘 치르셨습니까? 조문을 못 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장례 마무리 잘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 유언을 지키려고 왔습니다.”
“네?”
“아버지께서 지난 가을 병원 앞에서 갑자기 비가 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과장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갖고 계신 우산을 주셨다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전에 꼭 과장님께 우산 값을 치러야 한다고 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환자분의 아드님은 저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표현할 수 없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 죄송함, 감사함 그리고 아쉬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아드님에게 대충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그날 외래가 끝나고 해가 질 때까지 저는 그 봉투를 바라봤습니다. 봉투 안에는 환자분이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 환자분을 위해 우산을 들고 와서 전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아니더라도 다른 분이 비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했다면 마찬가지로 전해드렸을 겁니다. 혹은 급히 지나가다가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우산을 전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또 다른 우산이 없었다면 환자분에게 우산을 드렸을까 이러한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날 저에게 감동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환자분의 마음이었습니다. 우산을 건네준 일이 대단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치료받고 있던 힘든 순간에도 저를, 제가 드린 우산을,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보답하려 하신 겁니다. 의사로 살면서 월급도 받고, 보너스도 받고, 촌지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날 받은 우산 값만큼 마음이 벅차고 감동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개원을 한 저희 병원 한편에는 많은 우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제 우산을 받고 감동을 받은 환자분을 기억하며, 지금 저희 병원 환자들이 갑작스러운 비로 젖지 않도록 우산을 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우산을 빌려 간 환자분들은 직접 우산을 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오래 저희 병원에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빌린 우산은 우산 값을 대신 주시는 것보다 빌린 우산을 그대로 돌려주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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