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병과 잘 지내는 법 [23년 여름호]

편집부

news@ksnnews.or.kr | 2023-06-01 10:34:11

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_환자 및 환자가족

박혜균

맡은 업무로 연말 결산에 매달리느라 1992년의 12월은 무척이나 바빴다. 연말 결산을 끝내고 이틀간의 신년 휴가를 보낸 후 출근준비를 하던 아침이었다. 스타킹을 신으려고 다리를 쭉 뻗었는데 허벅지에서 복숭아뼈 윗부분까지 붉은 반점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10시쯤 출근 가능함을 연락해놓고 피부과를 방문했다. 선생님께서는 다리 상태를 보자마자, ‘자반증입니다. 신장에 문제가 있는 거니 대학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 합니다. 소견서를 적어드리죠.’라며 진단을 마쳤다. 이튿날 사무실에는 연가를 신청하고 대학병원 신장내과 진료 후 입원을 하게 되었다.

딸아이를 봐주시는 어머님께 ‘당분간 입원하니 아이를 어머님 집에서 재워주셔요.’라고 부탁드리고 ‘별일은 아닐 거야.’라는 생각으로 입원했다. 그런데 입원하여 링거를 꽂게 되자 소변이 잘 나오지 않으면서 내 몸은 퉁퉁 붓기 시작했다. 평소 40kg의 왜소한 체격이 일주일 만에 60kg에 육박하여 움직임이 엄청 둔하게 변해버렸다. 졸지에 각종 검사를 하면서 동시에 부기를 빼는 링거와 이뇨제 처방을 받아야 했다. 신장조직검사, 신장 초음파, 골수검사, 대장과 위장내시경에다가 수시로 하는 혈액검사 끝에 나온 병명은 ‘상세 불명의 사구체신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뇨제 처방으로 부기가 모두 빠져 몸무게가 42kg으로 내려와 몸이 가벼워진 거였다. 문제는 Cr 4점에 BUN이 42라는 거였는데, 처음에는 그 수치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비뇨기과 레지던트로 내 조직검사를 했던 친구는 내게 와서 Cr과 BUN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투석이나 이식할 준비를 해야 하는 수치야.”로 결론을 맺었다.

퇴원 전, 담당 교수님께서는 ‘단백뇨가 4,000이고 혈뇨도 있고 스테로이드를 쓰려니 나이가 너무 젊고’라면서 투석실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조만간 이곳에 와야 할 겁니다. 병명을 알았으니 약은 계속 먹게 될 거고 투석을 하게 되면 여행도 어려워지니 퇴원하면 직장은 그만두고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지내세요.” 교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투석실은 안 갈 거야.’라는 생각으로 퇴원 후 평소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설거지와 빨래 등의 집안일은 남편이 전담하게 되어, 퇴근 후 집안일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보름마다 병원진료를 받았고, 혈액과 소변검사를 한 후에 결과를 듣고 약을 받아왔다. 직장에서는 ‘신장이 좋지 않다’라는 점을 배려하여 현장 출입을 해야 하는 자재과에서 사무실 근무만 하는 총무과로 보직을 변경시켜 주었다. 출근하면 사무실에만 있어도 되는 근무 환경은 확실히 몸의 피로도를 줄여주었다. 젊은 나이를 고려한 교수님의 배려로 스테로이드 처방을 하지 않았음에도 보름마다 하는 검사에서 단백뇨와 혈뇨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교수님께서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면 단백뇨가 더 빨리 줄어들 텐데’라며 아쉬워하셨지만, 무엇이든 해야 하는 성격과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남편이 집안일을 하고, 직장에서도 배려를 많이 해준 덕분에 단백뇨가 있음에도 몸이 붇는 일은 없었다. 

Cr과 BUN은 변함없이 퇴원 때의 수치였지만, 외관상 환자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2년이 지난 후, 교수님께서는 ‘단백뇨가 이제 아주 소량만 보입니다. 혈뇨는 없어졌어요.’라며 약을 줄여 처방해주셨다.

몸도 붓지 않고 단백뇨도 소량만 나온다는 진단을 받자, 나는 갑자기 내 건강에 대해 ‘이제 신장병이 다 나은 거겠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남편의 직장 발령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신장은 한 번 나빠지면 나아질 수 없다’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이사한 곳에서는 병원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사한 곳에서 구한 직장도 이전 직장처럼 일이 많지 않아 내 몸에 대한 경각심을 줄어버려 병원 출입을 하지 않는 것에 일조한 셈이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별 탈 없이 생활했다.

10년간 내 몸은 한 번도 붓지 않았고, 육안적 혈뇨도 없었으며 단순한 감기로라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그래서 신장병이 다 나았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 한계였던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지발가락이 퉁퉁 부은 데다가 통증이 심해, 남편의 운동화를 신어야 할 정도가 되어 별수 없이 병원에 가봐야 했다.

나는 뼈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정형외과를 방문했다. 하지만 곧장 신장내과로 가야 했고, 신장 이상으로 인한 통풍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날 혈액검사에서 또다시 익숙한 숫자인 Cr 4.6과 BUN 50을 만나게 되었다. 통풍을 유발한 요산 수치는 9였다. 크레메진과 요산약 처방이 내려졌고, 한 달에 한 번씩 혈액과 소변검사를 하면서 인을 낮추는 약과 칼륨제거제가 추가되었고, 나중에는 위장약도 처방되어 약 봉투가 점차 두꺼워지고 있었다.

약이 늘어날 때마다 병원에 가는 길이 힘겨워져, 나도 모르게 우거지상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동창회에서 조직검사를 했던 친구를 만나 ‘병원에 가는 일이 힘들다.’라고 하소연하자, 친구는 내 하소연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

“의사는 아픈 사람만 상대하지. 한 마디로 힘들다 우울하다는 것을 얼굴에 써 붙인 사람들만 대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돼. 그러니까 너는 진료를 받을 때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옷도 화사한 거로 입고 가. 우울한 환자들 사이에서 환한 표정과 씩씩하게 인사하는 환자를 보면 의사도 조금이라도 정감이 가니 좋아하거든. 평소에도 많이 웃고 즐겁다고 생활하면 몸도 거기에 반응해서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어. 할 수 있지?”

친구의 그 말은 그 후로 내 투병의 신조가 되었다. 병원에 갈 때면 화사하게 꾸미고 진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교수님! 안녕하세요!’라며 큰소리로 인사하고, ‘잘 지냈냐?’는 질문에는 ‘아주 잘 지내요. 다만, 이런 이런 일은 있었어요.’라며 내 상태를 긍정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했다. 

웃을 일이 없으면 TV의 개그프로그램을 보면서 웃으려 노력했고,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 과장하듯 웃는 일도 익숙하게 되었다. 다행히 남편이 우스갯소리를 잘해 남편과 함께 있는 저녁 시간에는 웃을 일이 더 많았다. 병을 앓게 된 덕분에 즐겁게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 셈이었다. 세상을 정석대로 살던 내가 새로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한 시기였다.

2011년 4월 14일. 석 달 연속 Cr이 7을 넘게 되면서 교수님께서는 ‘투석 혈관을 만들어야 합니다.’라며 혈관외과 소견서를 적어주셨다. 혈관 수술 후 직장에 사표를 내고,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되었네. 잘해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 운동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수술 2개월 후부터 투석할 거라며 그동안 몸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출근할 일도 없고 성인이 된 딸은 서울로 직장을 구해 나가 있어, 집안일도 그리 많지 않은 덕분에 몸이 아주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개월 뒤 정기검진에서 Cr이 6점대가 되고, 또 1개월 뒤에는 6으로 변하면서 BUN도 소폭 내리는 결과지를 받게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투석을 좀 미루자’라고 하셨고,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남편은 ‘공기 좋고 물 맑은 고향으로의 이사’를 추진했다.

2011년 7월, 우리 부부는 마당이 넓어 텃밭까지 있는 집을 사들여 고향으로 이사하게 되었다.“텃밭에 무농약으로 농사지은 걸 먹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푹 쉬면 투석은 안 해도 될 거야.”

남편의 말 덕분이었는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로 투석은 계속 미뤄졌다. 투석을 예상했다가 투석이 미뤄지니 세상을 다시 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려견을 데리고 즐겁게 산책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산행도 즐기고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는 식도락가로 생활할 수 있었다.

이전에 다녔던 직장 상사가 인근 도시로 발령받으면서 ‘재택근무’를 하도록 배려해주셔서 재택근무로 직장생활도 계속할 수 있었기에 금전적인 걱정도 하지 않는 생활은 ‘사는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가장 즐겁고 신명 나게 산 시간이었던 셈이었다.

2개월마다 가는 병원은 늘 일정한 수치의 결과가 나왔고, 내 컨디션은 늘 ‘좋다’라고 느낄 정도로 유지되었다. 투석은 계속 미뤄졌고, 대신 투석을 위해 만든 혈관은 심장비대증이라는 부작용을 동반하게 되어 투석 혈관을 막는 시술을 받아야 했다. 혈관을 막고 나니 심장이 본래 크기로 돌아와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소화도 잘 시키고 소변도 시원하게 잘 보는 생활은 내가 신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 정도여서, 나는 건강한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며 환자라는 역할을 망각할 때도 있었다.

인제야 그때의 상태가 ‘나빠진 신장에 몸 상태가 적응해버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내 몸이 다른 신장병 환자들과 달리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 거였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즐거움은 또 10년이 고비였다. 2022년 1월부터 내 신장 수치는 한계점을 벗어나 버렸다. Cr은 8에서 10이었고, BUN은 140 이상으로 확 올라가 버린 거였다.

교수님께서는 ‘이 정도 수치면 활동에 제약이 엄청 클 텐데?’라고 우려감을 표시했지만, 내 몸은 여전히 활동에 제약이 없을 정도로 유지되었다. 소변도 잘 보고,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쉼 없이 움직여도 피로함을 느낄 수 없었다.

진료 때면 ‘컨디션은?’이라는 교수님 말씀에 ‘좋아요’라는 대답을 자신 있게 했다. 교수님께서는 투석을 말씀하셨지만, ‘컨디션은 좋은데요’라는 내 말에 강제하지 못하셨다. 나는 겨우 찾은 즐거운 일상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무모한 생각으로 투석을 거절했던 셈이었는데, 그 무모한 생각이 기어이 일을 일으켰다.

올 1월 10일 새벽에 일이 터졌다. 새벽 3시에 아랫부분이 빠지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갔는데, 결과는 변기에 가득한 적홍색의 혈뇨였다. 그리고 3분마다 아래가 빠지는 것 같아 화장실 출입을 했고 그때마다 적홍색 혈뇨가 변기를 가득 채우기를 5회 있고 난 뒤, 갑자기 소변이 끊겨 버렸다.

방광에 소변은 가득 차 있는 느낌인데, 변기에 앉으면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거였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병원으로 내달렸다. 교수님께서는 ‘입원해서 검사해야 한다’라고 하셨고, 나는 ‘투석할 때가 된 것 같으니 입원해서 응급투석을 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 진료 때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젠 투석해야지’라고 하셨던 교수님께서 반가운 표정으로 ‘잘 결정했어요.’라며 입원실을 배정해주셨다.

관을 넣어 소변을 빼고 나니 그때부터 소변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소변이 나오니까 퇴원해버릴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Cr4에서 진단받고 30년 넘게 건강한 사람처럼 즐겁게 지냈으니 이제는 정석대로 해야지’라며 저녁에 펌카데터 시술 후 두 시간의 투석을 마음 편하게 받았다.

이제 투석을 시작한 지 1개월이 지났고,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투석은 중단할 수 없으니, 아마도 이번 세상이 내가 느끼는 마지막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도 즐겁게 새롭게 맞은 이 세상을 즐겁게 지낼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장애인 등록이 되면 직장을 구할 생각에 초보 실력인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배우고 있고, 건체중 관리를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반려견과 함께 걷고 있다. 덕분에 주 3회의 투석은 주 2회로 변경되어 투석의 고단함을 크게 느끼지 않는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스러운 분기점은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하기 쉽지만, 생각을 바꾸면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즐거운 삶이 될 수도 있다. 투석하게 되면서 내 삶은 또 다른 분기점을 만났지만 별다르게 달라진 점은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스스로 ‘투석인으로서 새롭게 꾸려보는 즐거운 일상 만들기’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사는 쪽을 선택한 덕분일 것이다.

앞으로도 투석 혈관을 잘 관리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아있는 즐거움을 찾는 생활을 하다 보면, 새로운 의료기술을 만나는 행운도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즐겁네’라는 만족감이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임을 잊지 않고, 이전처럼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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