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의 종점을 바라보며 [24년 가을호]
편집부
news@ksnnews.or.kr | 2024-11-20 16:21:47
우리에게 윤리는 서로를 결속하는 끈이다. 규정을 따르며 절제하는 미덕은 아름다운 공존을 이룬다. 윤리를 지향하는 공동체적 의지가 단체의 중요한 사업을 이끌고, 드높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것이다. 한편, 집단이 윤리적 현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는 이유는 대의를 서로 확인하여 함께 그것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회원의 윤리적 결정을 망설이게 하거나 혹은 회원의 윤리적 행동에 어떠한 불이익이 따르는 환경이라면 마땅히 개선되어야 하겠다. 회원이 여건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선택한 처신을 놓고 갈등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지혜를 모아 드러난 현상의 이면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기관이 국가로부터 위임받아 건강보험 요양급여를 환자에게 제공하면, 보험공단과 환자는 소정의 금액을 지불한다. 법정 진료비인 공단 청구액과 환자 부담금을 의료기관이 임의로 가감하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 한편 의료수가의 적정성 등 여러 요인이 의료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인공신장실 의료인의 자격 요건이나 진료를 허용하는 환자 수에 대하여 별다른 제한 규정이 없으므로 의료의 질 관리에 허술한 측면이 있다. 심지어 환자 부담금을 위법하게 감면하면서 그로 인한 손실을 환자 수의 과다 확보나 의료인력 인건비 지출의 감축으로 벌충하려는 시도가 가능하다. 그러한 행위는 의료의 질 저하를 전제하므로 윤리적 문제마저 안고 있다. 의료기관이 진료와 무관한 서비스로 즉 음식이나 차량의 제공 등으로 과당 경쟁함은 여러모로 정당성을 잃겠고 저수가의 현실과도 모순된다.
인공신장실의 비윤리적 행태는 1990년대부터 이어져 왔다. 의료기관 설립 문턱은 낮았고 말기콩팥병 환자가 급증하던 시기에 여러 부류가 인공신장실을 기웃거렸다. 환자 수를 무리하게 늘리느라 혈안이었던 일부 주체는 진료의 질을 뒤로 하고 비윤리적 혹은 위법한 행위로 환자를 유인하였다. 그 무렵의 사회적 여건에서 그들의 영업 전략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자, 유사한 방식의 인공신장실 개설과 운영이 한때 전국적으로 뒤를 이었다.
투석협회와 신장학회는 위법 행위를 일삼던 기관들을 고발하며 대응하였고, 각종 매스컴은 무료 투석기관들의 불법성과 환자가 입게 될 피해를 여러 차례 다루며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일깨웠다. 일련의 노력과 사회적 여건의 개선에 영향을 받은 듯, 마침내 해당 기관들은 확장세를 멈추었으며 환자들의 호응을 잃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대중적인 파급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 도달했다. 그러나 위법한 기관들이 변질시켜 전파한 인공신장실의 문화는 현재까지 곳곳에 남아있다.
인공신장실 문화의 변질과 확산 과정을 잠시 되짚어 보자. 정상적 기관들마저 조금씩 유인행위에 가담하기 시작하더니 부당한 행태는 더욱 빠르게 번졌고, 결국 비뚤어진 의료 문화가 환자들과 투석기관들 사이에서 제법 큰 바람을 타게 되었다. 부당한 서비스에 현혹된 환자들은 곳곳에서 유사한 서비스를 요구하였고 상당수의 기관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한때는 일부 상급종합병원조차 음식을 제공할 정도였다. 회원들의 일탈이 늘면서 자체적인 개선 의지가 약해지기도 했었고, 당국은 위법이 만연함을 알고서도 여론의 눈치를 살피느라 방관하기 일쑤였다. 해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무질서가 유독 한국의 인공신장실에서 나타난 이유를 든다면 가장 먼저 정부의 졸속주의를 말하고 싶다. 한국은 인공신장실 설치와 운영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채 투석 치료의 보급을 시작한 국가였다. 제도적 준비가 미흡했던 탓에 혼란이 뒤따르고 갖가지 행태가 기승을 부렸다.
이제 비윤리 3종 행태를 하나씩 나누어 살펴보겠다. 우선 진료비의 본인부담금 감면이나 금품 제공은 기획적 불법 기관들이 사용하던 대표적 유인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의료비용의 부담을 줄여주는 여러 단계의 공공복지가 차차 마련되었고, 수혜자도 꾸준히 늘었다. 또한 경제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요양급여 비용의 본인부담률 10%를 어려워하지 않는 투석 환자도 오늘날 뚜렷하게 늘었다. 다른 무엇보다 진료의 질을 우선하여 의료기관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환자나 보호자 사이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근래에 신장투석 전문의와 인공신장실 인증기관을 찾는 환자가 늘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음식 제공은 투석실에서 가장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맞이한 4년간의 코로나 유행으로 그런 관행이 마침내 끝을 보게 되었다. 특별 방역 기간을 거치면서 투석실 대부분이 음식 제공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은 환자가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하고 있으며, 통원하는 기관에 더 이상 음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재가 정상이며 과거가 비정상이었다. 외래 환자에 대한 의료기관의 음식 제공이 언제나 위법이었음을 떠올리면, 익숙했던 과거의 일상이 지금에 와서는 매우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지나간 관행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차량편의 제공이다. 환자의 집을 왕래하며 정기적 통원을 돕는 것은 의료기관의 임무가 아니다. 그런 일은 세계적 흐름에 따라 공공복지 시스템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그럼에도 투석 환자를 태워 이동시키는 의료기관이 국내에는 아직 상당수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복지 체계가 형편없던 시절에 투석실의 차량 운행은 환자 확보에 유리했었다. 기관들의 이해관계적 방책을 따라 장애인 환자의 의료기관 선택이 더 이상 좌우되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 불편한 그들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길이다. 앞으로는 다른 많은 국가에서처럼, 국내의 장애인 환자들이 법으로 명시된 자신의 이동권을 당당하게 그리고 수월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교통 관련한 복지 현황과 차량 제공을 묵인하는 현행 법규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자. 모든 투석 환자는 장애인으로서 교통약자법의 수혜자에 속한다. 국토교통부는 교통약자의 이동을 돕기 위해 꾸준히 힘쓰고 있으며, 2013년부터는 각 지자체가 특별교통수단을 도입 및 운영하도록 매년 국비로 지원 중이다. 장애인의 일반택시 이용을 후원하는 지자체가 늘고 있는 것이나, 사설 재가복지센터가 요양보호사를 파견하여 투석 환자의 내원을 돕는 것도 다행스럽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통원 문제가 어느덧 개인적 해결 범위로 국한되지 않고 중앙 및 지방 행정부의 복지사업에 포함되어 있다. 만일 보건복지부가 외래 투석 환자의 교통 문제를 의료기관이 나서서 해결하도록 계속 기대하거나 조장한다면, 그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기에 더욱 심각하다.
의료법 27조 3항 1호(‘환자의 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개별적으로 관할 시장·군수·구청장의 사전 승인을 받아 환자를 유치하는 행위’)는 2002년에 삽입된 예외 조항으로, 그 목적은 형편이 곤란한 환자가 의료기관의 도움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즉 지자체장이 환자의 처지를 파악하고 개별적으로 승인하면 의료기관이 진료비를 감면하거나 교통 편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경제와 복지가 괄목할 정도로 성장한 오늘날, 해당 의료법 조항을 구제와 자선으로 활용할 여지가 매우 희박해진다. 다만 혈액투석 분야에서 의료기관이 차량으로 환자를 확보하려는 목적에 해당 법조문을 이용할 여지가 남게 된다. 현실과의 괴리가 커지고 본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법조문이 있다면 개정되거나 삭제됨이 마땅하다. 불필요한 법이 뜻밖의 혼란을 부추긴다.
이어서 의료법 하위 지침의 문제를 살펴보겠다. 의료기관이 내원객에게 차량 편의를 제공하되 당국의 지침을 따라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보건복지부는 2003년의 지침에서 차량 운행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였는데, 의료기관과 정류장 사이를 오가는 셔틀버스 운행조차 쉽지 않았다. 교통이 취약했던 여러 지역에서 민원이 쇄도하자, 당국은 1년 후 의료기관의 운행규제를 완화하였다. 특정 지역에서 환자의 교통 문제를 해결하려면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그리고 지자체가 앞장서야 하는데, 보건당국은 지침의 변경을 통하여 무엇보다 의료기관이 직접 해결하기를 기대하였다. 새 지침은 환자 유인 목적의 차량 제공을 처벌 대상으로 명시하였지만, 유인을 차단할 수 있는 구체적 제한 사항들을 거의 삭제하였다. 의료기관이 가급적 가까운 장소로 차량을 한정하여 운행할 것과 운행 전에 반드시 지자체장의 승인을 얻을 것을 요구하는 정도에 그친 새 지침은, 승인 기준과 승인 후의 관리를 모두 지자체장 자율에 맡겼다.
새 지침은 운행의 범위를 ‘가급적 가까운 장소’로 기술할 만큼이나 그 내용이 느슨하였다. 지자체의 일괄 승인을 얻기만 하면 의료기관은 사실상 거리의 제한도 없이, 환자의 형편과 처지를 불문하고 모든 투석 환자의 집까지 차량을 운행할 수 있도록 지침이 길을 열어준 셈이다. 혈액투석과 같은 특별한 분야에서 차량의 제공이 환자 유인의 빌미가 될 수 있음을 당국이 놓친 것이다. 더하여 각 지자체는 자율적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승인의 결정이나 사후 관리에 있어서 저마다 성향이 달라졌다. 의료 질서의 교란을 경계하느라 좀처럼 승인하지 않는 지자체가 있는 반면, 통원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의 해결에 먼저 의료기관 차량을 활용하려는 듯이 승인 신청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지자체도 있다. 동일한 행위가 지자체에 따라 합법이 되기도 하고 위법이 되기도 하는 이상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지역 경계선이 이동의 제한선이 아니므로 환자들은 차량을 제공하는 더 먼 지역으로까지 유인될 수 있다. 어쩌다 유인 사례가 확인되면 지자체나 사법기관이 해당 기관에 책임을 묻고 끝낸다. 일괄 승인의 남발과 사후 관리의 부족으로 의료 질서가 훼손되더라도 지자체는 책임질 일이 없다. 이렇듯 현행 법규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체적인 기준에 따라 의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언젠가는 모든 상황이 정상적으로 되돌려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부당한 현실을 기한 없이 연장하겠다는 생각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회원들의 혼선을 조속히 가라앉히고 모든 지역에서 질서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자정 운동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공개적이거나 혹은 비공개적인 내부의 비윤리적 잔재를 더 이상 관망하지 않고,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자율적 역량을 발휘하며 긍정적 변화를 모색해야 하겠다. 남아있던 일부의 관행을 마저 해결한 후에는, 우리가 외부의 부당한 행태에도 적극 대응함으로써 전반적 개선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 올바른 의료 문화를 주도하여, 환자를 돕고 사회에 공헌할 기회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끝으로 특별한 지역을 언급하겠다. 차량 제공이 지역 전체의 관행처럼 된 곳이 여럿이다. 선제적이 아니라 수세적으로 제공하는 회원 기관이 역내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지역에서 특정 기관이 선제적으로 차량 제공을 시작하면 일대는 한동안 혼란을 맞이하는데, 시간이 흐른 후 대부분이 뒤따라서 제공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지역이 더러 생겨난다. 관행 지역은 자연스럽게 인접 지역에 영향을 끼쳐서 수세적 제공 기관을 더 늘리고 관행 지역의 범위를 더 넓힌다. 한편, 차량에 의한 여러 과중한 부담에 제공의 중단을 바라는 회원도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역학 관계상 개별적인 결행이 쉽지 않다. 차량 운행을 지속해야만 환자 수를 유지할 수 있거나, 운행을 중단하였을 때 환자의 이탈이 예상된다면 그러한 상황이 곧 과당경쟁의 상태이다. 의료기관이 과당경쟁을 멈추어 비합리적 부담을 덜어내고, 진료의 질에 더욱 집중하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관행 지역에서 서로가 합의하고 동시에 결행한다면 차량 운행의 무난한 종료가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교통약자 환자의 이동지원이 더 확대되기를, 그리고 시대 흐름에 맞추어 관련 의료법규가 개정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는 전문가 집단이므로 사회적 미흡이나 부당함을 탓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서서 사회적 개선을 촉진해야 한다. 자율적으로 내부의 관행을 정리하여 질서를 바로 세우며, 나아가 인공신장실 문화의 전반적 정상화를 앞당기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역할이라 하겠다. 신장학회가 그 일을 위해 앞장서기로 한 것은 다행스럽다. 늦어도 2025년 5월까지, 학회는 인공신장실 차량편의 제공을 모든 지역에서 종료할 것을 회원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의료기관은 본연의 영역을 지키며 위임받은 사항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와 지자체가 교통약자 환자의 이동을 더욱 충실히 지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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