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23년 가을호]

편집부

news@ksnnews.or.kr | 2023-09-01 13:47:12

수기공모전 우수상 수상작_환자 및 환자가족

황태석 / 연세메디하임병원(진료병원)

내가 신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서른 살이 되던 2007년이다.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던 3월 초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정신없이 바쁜 시기. 퇴근 후면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회식 자리에 끌려다녀야 했다. 전년도까지는 회식에서 몸을 사린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술자리가 반갑지가 않다. 음식도 술도 모두 맛이 없다. 어서 집에 가서 눕고 싶은 생각뿐. 아마도 그때가 몸이 내게 보내는 마지막 신호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눕기가 무섭게 잠이 든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잠이 드는가 싶다가도 다시 깬다. 소변이 마렵다. 그런데 막상 화장실에 가보면 소변의 양은 턱없이 적은 편이다. 그렇게 밤새 4~5회씩 화장실을 드나들다 보면 어느덧 아침이 된다. 충분하게 잠을 못 자니 종일 멍한 상태이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뭔가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렇게 있다가는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피로의 원인도 찾을 겸 몸에 좋은 보약도 먹어 볼 생각으로 한의원을 찾았다. 이 한의원에서는 초음파로 장기를 포함하여 몸의 여러 곳을 봐주는 곳이다. 한의사가 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하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걱정하는 표정으로 신장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종합병원을 찾아 검사를 진행해 보라고 권한다.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했다. 크레아틴인 수치가 20을 넘는다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지금이라도 바로 가보라고 한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입원을 했다. 바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말기 신부전증 진단을 받게 된다. 의료진들이 바쁘다. 서둘러 목에 응급투석을 위한 카테터를 시술받고 그날부터 생전 처음 보는 인공신장실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내 몸의 혈액을 기계에 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기 신부전증이라는 진단과 투석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나에게 찾아오게 되었다.

그 후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받으니 컨디션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의료진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야 할 투석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고향 집이 시골이라 주변에 혈액 투석 병원이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할 수 있는 복막투석을 위해 시술을 받고 투석 방법을 배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에 와보니 이미 배송된 투석액 박스가 방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저게 뭐지?” 어리둥절한 마음이다. 하루 네 번, 여섯 시간 주기로 투석을 해야 한다. 

1년짜리 계약제 교사는 이제 퇴직한 상태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상처받은 최악의 상황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투석 시간의 제한으로 외출을 하는 것도, 또 먹지 못하는 음식도 너무나 많다. 뭔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도무지 그것이 뭔지를 모르겠다.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이 생활의 반복임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미래를 위한 준비는커녕 매달 나가야 하는 의료비와 생활비 걱정에 한숨만 나온다. 멀쩡히 일하러 나갔다가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자식의 모습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막막할 것 같다. 면목 없다는 단어밖에 어울리는 말이 없다.

몸도 마음도 지친 최악의 상황 속에서 몇 달을 보내다 마침내 희망의 길을 발견한다. 자립이 가능한 내가 나아가야 할 길. 바로 교원 임용시험을 쳐서 정교사가 되는 것이다. 2007년도까지 교원 임용시험에 일반 전형으로 4번의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불합격. 하지만 이제는 신장장애로 장애인 전형 응시가 가능하다. 어쩌면 이 시험을 통해 현재 놓인 이 암담한 현실을 180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하루 4번 투석을 하며, 그 해 12월에 있을 임용 시험을 준비한다. 그리고 투석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나는 경기도 교육청 소속의 정규 교원이 된다.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너무나 기뻤다. 그런데 기쁜 감정 뒤에 따라오는 이 불안감은 뭐지? 앞으로 학교에 출근을 하게 되면 혼자서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 몸으로 타지에서 혼자 생활할 수 있을까? 직장에서의 투석은 어찌할 것인가? 하루 4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수업 일정은 또 어쩔 것인가? 합격 이전에 했던 걱정과는 또 다른 걱정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부딪혀보자. 발령받은 곳에 방을 얻고, 집에서 세 번, 학교에서 한 번 투석을 해가며 홀로 직장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던 중 야간 기계 투석이라는 신세계를 접하게 되어 잠잘 때 1회 만으로 투석과 직장 생활을 훌륭하게 소화해 나갔다.

부모님은 열심히 사는 내 모습을 보며 대견해하셨다. 하지만 한편으론 늘 그 모습을 안쓰러워하셨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런 자식을 위해 정말 대단한 결정을 하신다. 신장 하나를 자식에게 공여하기로 결정하신 것.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고 이식 수술이 가능하다고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엄마와 나는 서로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수술 준비가 진행되었다. 신기하게도 수술 날짜는 내가 태어난 생일날과 꼭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33년 후가 되는 2010년 11월 25일에 또 한 번 나에게 생명을 선물하셨다.

그렇게 엄마로부터 건강한 신장을 선물받고 다시 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투석 때문에 외출을 고민하지도, 그 무거운 투석액 박스를 싸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든 가고 싶을 때 가고, 먹고 싶은 것도 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뭐든지 먹을 수 있다.

그렇게 수술을 받고 3년 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다음 해 씩씩한 사내아이도 낳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내 삶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고, 즐거운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가정은 화목하고, 직장 내에서도 동료와 학생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교사도 되었다. 운동을 하기 위해 시작한 탁구.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는 놀라운 결과도 있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여행도 자주 다녀왔다. 투석을 시작할 때 이제 다시 내게 오지 않을 것 같던 행복한 시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원할 것 같던 이 생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식을 받은 지 6년이 지난 시점. 이때부터 크레아틴이 서서히 상향 곡선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진행을 늦춰보자는 의료진의 의견에 그 힘들다는 무염식도 1년 가까이 해보았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썼지만 이미 손상된 이식 신을 다시 회복시키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3개월마다 방문하던 외래 일정이 6주로, 6주에서 4주로, 다시 2주로 그 기간이 계속해서 짧아졌다. 그 단축되는 기간만큼 몸은 점점 엉망이 되고 있었다. 전해질 불균형으로 극심한 빈혈이 찾아왔고, 그것은 시력에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자다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렇게 버티고 버텼지만 이식을 받은 지 8년째 2019년, 새로운 학교로 자리를 옮긴 지 1달이 지난 4월 초. 이식받은 신장의 수명이 다해버렸다. 재투석을 해야 하는 상황. 4월 초 열흘간 입원을 하며 응급 투석을 위해 가슴에 카테터를 다시 심었고, 왼팔엔 투석 혈관을 만드는 시술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렇게 난 언제까지 될지 모를 투석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투석 생활은 12년 전의 투석 생활과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다. 투석 방법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예전엔 나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이번은 돌봐야 할 대상인 아내와 자식이 있다. 막중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어떻게든 이 생활에 빨리 적응하고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혈액 투석에 적응하는 것이 처음에는 만만치 않았다. 투석을 받고 오는 날이면 두통이 심한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혈압이 200까지 올라 컨디션이 엉망인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응되지 않을 것 같던 혈액투석도 서서히 적응이 되어 갔다. 건체중을 맞추니 혈압도 안정이 되고 속도도 빠르지는 않지만 전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투석을 받게 되었다. 

체력이 없으면 투석도 힘들 것 같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전에 하던 탁구를 다시 시작하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산책도 하고 여행도 다니는 정도까지 몸은 회복되었다. 그리고 투석을 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대만으로 4박 5일간의 여행. 식단 조절을 하고 현지에 있는 병원에서 투석도 1회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투석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을 때 아내는 시간을 쪼개어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게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이다. 나는 앞으로도 2년 뒤면 상담 심리 박사의 남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1년 전부터 내 취미인 탁구를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10살짜리 아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늘어난 실력만큼 탁구에 대한 애착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이와 난 라켓을 들고 매일 탁구장으로 간다. 이 녀석 덕분에 내가 매일 운동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투석 생활이 더 수월한지도 모르겠다. 월, 수, 금 4시간씩 병원에 가야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올해 11월에 있을 여주시 생활체육 대회에 복식경기에 함께 서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생활. 현재 면 단위 소규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데 혈액투석을 시작한 기간과 일치한다. 지난 4년 동안 학교에서 직무 수행이나 학생들과 수업에 있어 건강을 이유로 공백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 수업에 있어 교과 수업과 더불어 학생들과 함께 그림책 만들기, 자서전 쓰기 등 책 쓰기 수업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작년, 재작년에는 지난 4년 동안의 책 쓰기 수업 결과물을 지역 도서관 7개 관에 기획 전시하였다. 업무에 있어서도 완벽에 가까운 성과들을 내놓아 여러 분야에서 직무 관련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특히 15년간의 교육 성과를 인정받아 2021년에는 모범 공무원 상(국무총리 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주 3회 투석 생활이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가정생활에서 있어서도, 또 직장 생활에 있어서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게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신장병은 생활에 많은 제약과 불편을 가져다주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꼭 제약과 불편만 가져다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중증 장애인이며 희귀 난치성 질병을 갖고 있는 15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내 삶은 다양한 제약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는 않다. 나는 제약된 삶 속에서 할 수 없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일과 가정과 사회생활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시련과 마주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길을 찾는다면 반드시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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