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성 교수 / 거창군 신&속내과 신장내과
김성규 조교수 /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신장내과 조교수
안기성 교수는 신장학을 전공하고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교육 활동을 하며 후학 양성을 위해 힘써왔다.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내과 전공의로 시작해,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교수, 병원 진료부장, 의과대학 학장 등을 거쳐 현재는 거창 신&속내과에서 신질환 환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제자인 김성규 교수를 통해 신장내과 전문의에 대한 안기성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Q1. 김성규 조교수
안녕하세요, 교수님. 즐거운만남 자리를 통해 교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퇴임하신 이후에도 환자 치료에 전념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퇴임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A1. 안기성 교수
퇴임 후 지금 근무하는 병원에 출근하여 주 3일 신장실을 중심으로 신질환 환자를 진료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틀은 화실에 나가 수채화를 배우고, 주 1회 성당에서 성경 공부하고, 매일 저녁 요가 수련하면서 1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퇴임 후의 나의 생활을 봤을 때, 맞는 말인 듯합니다. 하하. 지난 여름 간장 이식 수술을 받은 후 요가를 진심으로 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바쁘기는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어 좋습니다.
Q2. 김성규 조교수
은퇴 후에도 현재까지 투석 환자를 위해 열심히 진료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실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A2. 안기성 교수
열정적이라 하면 지금은 좀 민망한 말이지만, 나는 지난 시간에도 내가 보는 환자들과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의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들이 변화된 일상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 생각은 우리 의과대학의 첫 교수 연수회에서 비롯됐는데, 재단 이사장이셨던 故 이문희 대주교님의 질문에 기인합니다. 당시 대주교님의 인사 첫 말씀이 “여러분들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이으시길 “만약에 사람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되셨다면 당신들은 이제까지 실패만 해왔습니다. 이때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이기를 바랍니다.”
그 시절의 나는 돌보는 일은 간호사의 몫이라고 마음속으로는 반박했었는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진료를 하다 보니 대주교님의 말씀이 옳았구나 싶습니다.

Q3. 김성규 조교수
신장내과 분야 이외에도 음악, 미술, 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분야들을 섭렵하시게 되었는지요?
A3. 안기성 교수
아마도 내가 음악이나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하숙 생활을 한데서 연유된 듯합니다. 그 시절의 나는 초저녁잠이 많아서 8시쯤 자기 시작하면 새벽 12시 반 경에 일어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라디오 심야방송 밖에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밤 10시가 되면 사이렌이 울리고 청소년들은 귀가하도록 방송이 나왔어요. 또 심야 통행금지가 있어서 자정이 지나서는 나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음악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악대반에 차출되어 6학년 마칠 때까지 클라리넷을 불었는데, 중학교 가서는 아버님의 반대로 연주가로 진전되지는 못했고요. 문학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독일어 선생님의 말씀으로 첫발을 디뎠습니다. 당시 우리 반에서는 뒤쪽의 키가 큰 동기들이 유사 연애소설 책을 돌려보고 있었는데, 그 책을 빼앗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녀석들아 연애소설을 읽으려면 ‘춘희’부터 읽어라.” 하셨어요. 그래서 춘희는 내가 읽은 고전문학의 첫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계통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읽고, 또 듣고 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읽고 듣고 했기 때문에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이지는 못하고, 어느 영역에도 깊이는 없어요. 그건 내가 감상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미술은 다소 억지스럽게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까지 저는 정말 미술에는 젬병이었어요. 그 콤플렉스를 깨고자 정년을 2년 앞두고 시작했는데, 내가 재주가 없음을 확인하는 꼴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그린 산수유 한점은 내가 사랑하는 제자의 병원 대기실에 걸려 있습니다. 꽃이 노란색이라 진료 대기실을 환하게 해서 좋습니다. 그 그림을 가끔 보면서 내가 노란색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Q4. 김성규 조교수
전공의 시절부터 신장내과 분과를 준비하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신장내과에 관심을 두게 되거나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A4. 안기성 교수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신장내과를 접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방문차 들렀던 최준식 선생님께서 동문을 대상으로 한 신장학 강연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강연의 깊이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전공하고 싶은 과가 생겼습니다.
졸업 후 작은 병원에서 내과 전공의가 되어 훈련받고 있었지만, 당시 대구에는 김현철 교수님 한 분만 계셨고, 신장학 분야가 일반화되지 못한 상태여서 훈련이 어려웠습니다. 3년의 수련 기간 동안 당뇨병 환자 1명 보기도 어렵던 그 시절에, 당뇨병성 신증에 의한 말기신부전으로 복막투석 치료를 하시던 분이 입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대구에 있던 경북대병원을 포함한 3개의 대형병원을 다 다녔던 분이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담당 전공의였는데, 마치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투약부터 투석 치료 기술까지 정성스럽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그분이 첫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그 후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하여 근무하던 중 의과대학 설립 허가가 나고 세부 분과를 정할 때 신장 분과를 하고 싶다는 뜻을 선생님들께 말씀드려 허락받아 대학교 3학년 때 품었던 소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Q5. 김성규 조교수
신장내과 의사 수련 과정을 돌이켜보았을 때, 가장 중요하고 값진 시간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A5. 안기성 교수
제가 전공의 수련 받던 시절은 아직 내과의 세부 분과가 분리되지 않았었고, 대학병원급에서나 내부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병원은 지방의 작은 병원에서 갑자기 대학병원으로 진화되어 체계가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대구에서는 김현철 교수님이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에 계셨는데, 대구 경북 지방의 신장내과 환자분들이 가장 많이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가 뵙고 도움을 청했는데, 주 1회 오후 시간에 신장내과 전체 입원 환자의 상태 및 치료를 협의하는 회의가 있다면서 그곳에 참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1년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각 환자의 진단 방법과 순서, 치료 방법과 경과 추적 등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아주 큰 내과 병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이수영 선생님은 당시 전임의로 근무하고 계셨는데, 회의에서 논의되는 중요한 사항을 내가 그냥 지나칠까봐 담당 전공의에게 되물으시면서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습니다. 내게는 두 분이 큰 스승이지요.
또 한 분이 계시는데, 신장병리를 전공하신 분이셨습니다. 김용진 교수님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계명대 김현철 교수님의 초대로 동산병원 내에서 개최되던 신장내과 병리 집담회(월 1회)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내게 아주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나는 사구체 질환을 가진 환자의 진단과 치료에 이르는 핵심과 방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초창기부터 투석치료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회의와 신장 조직 검사를 한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병리 집담회를 매월 정기적으로 시행했었습니다.
Q6. 김성규 조교수
신장내과 환자들을 진료보다 보면 신체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문제도 같이 가진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환자들의 이러한 부분도 잘 어루만져 주셨는데요. 이런 진료 방식은 어떤 경험들을 바탕으로 습득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6. 안기성 교수
인턴 시절, 외래진료실에서 과장님의 처방에 따라 처방전을 발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환자분이 바쁜 일이 있다고 순서를 앞질러 자기를 먼저 봐달라고 떼를 쓰는 중에 말리다가 소아과 과장님 앞에서 대판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싸운 후 들어가니, 과장님께서 “안선생, 앞으로 환자를 볼 때는 그 사람이 글 무식한 사람인지 아니면 인(人) 무식한 사람인지 먼저 판단하시게.” 하셨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도 결국 인 무식한 사람 군에 속해 있었구나 싶었어요. 어쨌든 그 말씀은 내가 환자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되었습니다. ‘자세히 꼼꼼하게 설명하던지, 천천히 한 번만 설명하던지’ 판단의 실제 표현은 두 가지 중 하나로 되지요.
전문의로 진료하던 초년 시절에는 환자와 참 많이 다투었습니다. 설명하는 것을 못 알아듣는다고, 이야기한 대로 실행하지 않는다고 다그치고, 같은 말 계속 시킨다고 폭발하고···. 그런데 그게 다 내 탓이더군요. 의과대학 6년, 전공의 5년 동안 익힌 단어와 이론을 처음 듣는 환자가 바로 알아듣는다면 그 환자분은 정말 뛰어난 분일 겁니다. 내가 10년에 걸쳐 익힌 것을 한 번에 알아들을 만큼 환자들은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것이지 성가시게 할 목적으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그분들이 익숙한 방법으로 표현할 뿐이란걸, 우는 데 익숙한 사람은 울면서 요구할 거고, 윽박지르는 데 익숙한 사람은 윽박지르면서 도와달라고 하겠지요.

Q7. 김성규 조교수
신장내과는 그 안에서 분야가 넓고 다양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신장내과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7. 안기성 교수
신장내과는 진단에서 치료방침의 결정 및 시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견을 바탕으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검정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전문기능공이 아닌 고전적인 의사의 품격을 지니게 해 줍니다. 사구체 질환은 특히 더 그런 생각이 가지게 해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진료 분야 중 RPGN의 진단과 치료에는 거의 강박적으로 시간을 다툽니다. 혈뇨와 단백뇨라는 통상적인 소견에서 출발하여 진단과 투약을 통해 투석치료가 필요 없는 상태에 도달한 환자분을 오랜 기간 추적하다 보면, 환자분이 고맙고 내 스스로가 대견해집니다.
Q8. 김성규 조교수
저와 같은 젊은 신장내과 전문의에게 신장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비결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8. 안기성 교수
우선적으로는 신장의 생리를 아는 게 필요할 것입니다. 각 부분별 생리를 처음부터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모든 것의 합으로서의 생리를 알고 각 부분의 역할을 알아가는 겁니다. 저는 초년에 신장 생리 만을 다룬 작은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겉표지도 얇아서 휴대하고 다니기 좋았는데, 심심하거나 짧은 시간이 날 때 읽고는 했어요. 나는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 이를 통해 알게 된 지식을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삼았습니다. 때로는 세분화된 논문들을 읽을 때 그 논문의 신장학에서의 위치를 알아보는 데도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신장학의 역사를 아는 겁니다. 일전에 유럽신장학회장에서 작은 책자를 샀었는데, 그 당시까지 발표되었던 논문들 중 신장학의 치료나 개념의 전환점이 된 100편의 논문을 시기적으로 배열하면서 의미와 영향을 서술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신장학의 범위가 확산되는 과정을 보았는데, 신장학을 이해하는 개론서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Q9. 김성규 조교수
신장내과 전문의를 꿈꾸고 있을 젊은 내과 선생님들께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10. 안기성 교수
성향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조용히 사색하면서 단서들을 추적하여 결론을 얻어내는 의사에게는 신장내과가 좋은 영역일 것입니다. 힘들어하는 환자의 소변 이상 소견을 바탕으로 혈액검사와 영상의학 소견, 경우에 따라서는 현미경적 소견을 아울러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고 결과들을 검정해 가는 등 진단에서 치료에 이르는 일련의 전개 과정이 극히 논리적인 분야입니다.
많지 않은 환자를 대상으로 연속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진료의 특성상, 온화하고 사색적인 성품의 의사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분야입니다. 신장내과의 일 자체가 우리를 기능공이 아닌 사색하고 결단을 내리는 의사가 되도록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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