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동백꽃은 세 번을 피는 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면서 나무에서 피고, 두 번째는 꽃송이가 시들지 않고 떨어져 땅 위에서 피고, 마지막으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핀다고 한다. 자랑과 절개, 겸손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지닌 동백꽃들은 추운 겨울에도 주변을 붉게 물들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아름다운 동백꽃과 함께 여수 오동도, 부산 동백섬, 제주 한라산 동백길로 여행을 떠나본다.

붉은 동백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바다 위의 붉은 꽃섬 오동도 일주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여수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대표 관광지는 오동도일 듯하다. 멀리서 보면 섬의 모양이 오동잎처럼 보이기도 하거니와 예전에는 오동나무가 이곳에 아주 많았기에 오동도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인 오동도는 아주 작은 섬이지만 섬의 상징인 동백나무를 비롯하여 신이대, 후박나무, 팽나무 등 190여 종의 희귀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한국의 관광명소 오동도는 2012년 여수해양엑스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면서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바쁜 일정에 시간을 쪼개어 반나절 코스로 여수행 KTX에 오른 날, 차창 밖으로 아침부터 흩뿌리던 눈송이들이 쾌속 질주하는 KTX를 열심히 따라 달린다. 남쪽으로 가까워지면서 눈비는 멈췄지만 그래도 잔뜩 찌푸린 날씨다. 여수엑스포역을 나와 오동도 표지판을 따라 박람회장을 옆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기자기한 오동도를 한눈에 보기 위해 자산공원 일출정으로 향한다. 일출정에 올라 1층 카페에서 향이 진한 커피 한잔과 함께 여수 앞바다를 바라보니 풍경이 장관이다.
오동도까지 연결해 주는 768m의 아름다운 길은 일제 강점기에 여수신항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파제다. 지금은 오동도의 경치를 만끽하며 산책할 수 있는 곳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바 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방파제를 지나 섬에 들어서 용굴로 향하는 숲길로 방향을 트니 나무데크 길이 이어진다.

용굴에 다다르니 아이들이 신기한 듯 소리쳐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확인하며 즐거운 표정이다. 용굴 해안가의 기암괴석들은 하나하나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물개바위 안내판을 따라 내려가 주변 바위를 바라보며 물개나 비슷한 모양의 바위를 찾아봤지만 허탕이다. 모두들 “물개는 대체 어디에 있어요?”하며 의아한 얼굴이다.
대신 오동도의 명물인 하얀 등대전망대가 우리를 반겨준다.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서 천천히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며 오동도 주변의 바다 풍광을 맘껏 음미한다. 흐린 날씨 탓에 선명하지 않지만 멀리 보이는 거북선대교를 사진에 담아 추억으로 남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화살을 만들어 왜구를 무찌른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신이대 군락으로 만들어진 대나무 숲길이 우리를 맞아준다. 천천히 대나무 숲길을 지나니 우리 부부가 마치 일렬로 늘어선 위풍당당한 대나무 의장대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는 느낌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붉게 피어난 동백꽃들을 모델 삼아 사진에 담고 황토길을 따라 남근목으로 향한다. 붙여진 이름을 연상시키는 후박나무 줄기가 모습을 감추려는 듯 조심스레 서 있다. 갯바위를 둘러보고 황토길을 따라 광장으로 내려와 거북선과 판옥선의 자랑스러운 모습과 함께 오동도 동백꽃 여정을 마무리한다.
황홀한 야경과 아름다운 일출이 겨울 바다와 어우러진 동백섬 산책로
유명 가수의 노래 가사로도 유명한 동백섬은 제1의 항구도시인 부산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동백섬으로 이어지는 해운대 해수욕장 역시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로 동백섬에서 바라보는 마린시티 야경과 함께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었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동백섬을 지나 오륙도까지 이어지는 길은 부산 갈맷길 2코스로 18.3km이다. 갈맷길은 부산의 해안길, 강변길, 숲길, 도심길로 구성된 아름다운 길로 무려 700리에 이른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KTX 열차 창밖의 한적한 겨울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덧 부산역이다. 지하철로 해운대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겨울밤 동백섬 탐방을 위해 준비한 복장으로 숙소를 천천히 나선다. 동백중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애기동백들이 환한 미소로 지나는 사람들을 반겨준다. 나무 형상을 한 예쁜 가로등들이 하얀 등을 밝혀 길을 안내한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람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까지 사람들로 가득하다. 전망대에 다다르자 바다 너머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한 광안대교의 야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옆 누리마루 하우스도 이에 질세라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바다 건너 울쑥불쑥 솟아있는 빌딩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늘어서 있다. 언덕을 내려가 마린시티 야경을 감상하며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멈춰 서서 수면 위에 비친 또 다른 야경에 감탄을 연발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콩의 야경과 비교해 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황홀한 풍광이다. 추억으로 간직할 사진을 남기고 예쁜 야경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주말 밤의 여유를 즐긴다.
겨울이라서 조금은 여유가 있는 해님을 맞이하는 시간에 맞춰 동백섬으로 향한다. 해안산책데크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 일출을 감상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갯바위 위에는 망망대해에 비친 보름달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황옥공주 인어상이 우리를 맞아준다. 나무데크 길옆에는 삼각대를 장착한 전문사진작가들이 해님의 출발신호만 기다린다.
전망대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이 훤해지더니 해님이 고개를 살며시 내밀기 시작한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시간을 맞춰 해님 옆을 지나는 배는 멋진 모델이 되어준다. 수평선을 벗어나 동그란 모양으로 완전체를 갖춘 태양은 바다 위에 붉은 기운을 쏟아내며 하늘로 향한다. 해님으로 이어지는 바다 위 붉은 그림자는 마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신비한 고속도로 느낌이다.
해운대 겨울 바다에서 추운 날씨에 아랑곳없이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대단하다. 모래사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온 아이들이 갈매기들과 친구 되어 놀이를 즐긴다. 건강을 위해 저마다 열심히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을 보니 겨울 바다의 아침이 활기차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라는 동백의 꽃말과 함께 올해의 소망을 가득 담아 바다 저 멀리 푸른 하늘로 날리며 걷기를 마감한다.
붉은 동백 군락이 만든 환상 숲길에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한라산 동백길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에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은 동백길을 시작으로 수악길, 사려니숲길, 천아숲길, 돌오름길로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제주도의 울창한 산림과 표고버섯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참로 ‘하치마키 도로’와 임도, 표고버섯 운송로를 연결해 만든 총 80km의 길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아름다운 둘레길이다. 코스를 따라 한라산의 오름이나 생태 숲, 휴양림을 둘러보고 슬픈 역사와 산림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어 아름다운 섬 제주를 알리는 또 다른 아이콘으로 비상하고 있다.

아침 일찍 동백길의 시작인 법정사로 향하면서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에 걱정하다 안개비를 만나니 처음에는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그런데 안개를 너무 무시했던 건가? 한라산 중턱으로 갈수록 안개가 더욱 심해져 여정이 끝날 때까지 나의 주변을 맴돌아 시야를 흐린다. 물론 그 덕에 이번 걷기에서는 색다른 분위기의 풍경이 이어진다.
동백길은 법정사에서 동쪽 돈내코 계곡까지 13.5km 구간으로 일반인들에게는 40여 년 만에 개방되었다. 뼈아픈 역사의 현장인 법정사는 3.1운동보다 먼저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일본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의 일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이들의 넋을 기리는 항일기념탑을 지나면서 동백길을 알리는 진입 이정표가 우리를 기다린다.

이정표를 지나 숲길에 들어서니 동백길의 첫인상은 ‘환상 숲길’이다. 자연의 길을 그대로 살리면서 오솔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자연과 하나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로 발길을 들여놓는 기분이다. 이정표를 최소화하다 보니 숲길 방향이 가끔 헷갈리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나뭇가지에 달린 예쁜 리본을 보고 방향을 잡는다. 자연에 심취돼 걷다 보니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나 다행히도 울창한 수풀이 거대한 우산이 되어 비를 막아준다.

이윽고 다다른 곳은 우리나라 최대의 동백나무 군락지다. 길을 따라 드물게 볼 수 있던 붉게 핀 동백꽃들이 이곳에는 확연히 많아졌다. 나무 아래로 떨어진 꽃송이들을 모아서 누군가가 만든 예쁜 동백하트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뽀송뽀송한 흙이나 미끈미끈한 자갈들이 그대로 보존돼 걷는 길에 맛을 더해준다. 크고 작은 하천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울창한 숲 사이로 보이는 검은 계곡의 풍경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아쉽지만 동백길의 중간지점인 표고재배장을 기점으로 돌아간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지루할 수 있지만 햇빛의 각도에 따라 숲은 또 다른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은 느낌이다. 푸르름이 더해지고 오면서 길을 찾느라 놓쳤던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여유로움까지 생긴다. 물고기를 닮은 바위, 뱀처럼 나무를 휘감아 오르는 넝쿨, 원숭이 얼굴을 한 나무줄기가 눈길을 끈다. 고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걸으며 황홀한 환상 숲길 여행을 마무리한다.
여행 TIP. 오동도에 어르신이나 아이를 동반한 경우에는 동백열차를 이용하면 되고 여유가 있다면 유람선을 이용해 섬 주변의 기암괴석을 감상하는 것도 추천한다. 동백섬 산책로는 총연장 930m로 1시간이면 충분하고 누리마루 APEC 하우스를 관람해 보는 것도 필수 코스다. 한라산 동백길에서 편백나무 숲의 시오름 구간을 지나 전체 코스를 걸은 후 호출택시나 버스를 이용해 돌아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저작권자ⓒ 대한신장학회 소식지. 무단전재-재배포 금지]